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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선포/주일예배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2015/8/9)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몬1:16-19


<영상: https://youtu.be/A0pULHE0IPw>


몬1:16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그의 제자 빌레몬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편지입니다. 그 내용은 빌레몬과 오네시모라는 주인과 종 사이에서 일어나는 화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이런 개인적인 편지가 성경에 기록되고 영원토록 남아져서 오늘날 우리에게 읽히는 것인가. 그것은 신앙의 깊은 교훈이 이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수많은 갈등들이 있고 미움이 있고 분쟁이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은 피흘림이 있습니다.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이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 진정으로 바라는 한 가지가 있다면 한 단어로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화해’일 것입니다. 갈등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어떻게 멀어진 관계를 하나되게 할 것인가. 그 비결은 복음인데, 사도의 편지속에 복음의 아름다운 향기가 배어져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뿐만 아니라 그의 온 가족까지 직접 전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빌레몬에 대해 바울의 입장은 매우 권위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 권위로 충분히 많은 것을 명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느냐? 얼마나 많이 희생했느냐? 그러므로 내 요구를 당연히 받아줄 수 있지? 그러나 바울은 그리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앞세울 수 있는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빌레몬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사랑으로써 간구 간청합니다. 무엇을? 오네시모를 받아달라고. 무익한 종 하나, 쓸모없는 노예하나 그 마음안에 매여있는 것을 풀어달라고, 그 마음안에 있는 짐을 벗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얘기할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삶, 그것은 빌2장에 나와있는 것처럼 그는 근본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지만 그것을 버리고 자신을 비우시고 자신을 낮추셔서 종의 모습을 띄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안에 있는 매이고 눌리고 갇혀있는 것을 풀어주시려고 그 무거운 죄의 짐을 벗게 해주시려고 피흘려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 한 장의 짧은 편지속에 그리스도를 닮아있는 사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가 그리스도를 닮아있습니다. 우리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엡4:13]의 표현으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는 것. 그리스도를 본받아.


어제도 SNS 짧은 글 하나 보냈는데, 출12장 말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때 유월절 의식을 치르고 출애굽을 합니다. 어린양의 피, 그 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참으로 깊은 의미가 그 의식속에 있지요. 중요한 것이, 어린 양을 먹을 때 어떻게 먹어야하나. 우리 말씀 받을 때 어떻게 받아야하는가. 이것 가르쳐주지 않습니까. 머리 다리 내장 다 먹으라고. 삶아먹지 말고 불에 구워서 남김없이 싹 다 먹으라고.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를 본받는데 어느 부분만 본받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전인적인 구원. 모든 것을 다 닮아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지(知) 정(情) 의(意)’ 모든 면을 우리가 온전히 수용하고 삶속에서 온전히 소화하는 우리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요. 이 한 장의 편지 속에 정말 그리스도를 너무도 본받아 있는 사도의 삶이, 복음의 향기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부모되신 분들은 자녀 하나를 위해서 정말 모든 것을 다 비우고 낮추고 섬기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자녀는 귀하기라도 합니다. 고통 중에 내가 낳은 자식이 얼마나 귀하고 귀합니까. 그런데 여기 편지에는 자식도 아닙니다. 남입니다. 그것도 노예입니다. 물건으로 취급받던 시대인데, 그런데 그 노예도 돈 훔쳐 도망간 노예입니다. 그냥 죽여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정말 쓸모없는 노예라는 것입니다. 그 노예 하나, 그 노예의 마음에 힘든 그것 풀어줄려고 어떻게 이렇게 까지 할 수 있냐는 말입니다.


새로 전도되는 사람 있습니다. 그를 위해 우리는 얼만큼 낮아질 수 있습니까. 이렇게 섬길 수 있습니까. 이게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가 전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알게 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 복음의 실천, 행함입니다. 바울의 편지를 보면 정말 그가 복음을 행하며 정말 복음의 정신으로 살았구나 라는 것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오네시모를 빌레몬이 받아주길 간청하는 내용의 글을 쭉 쓰고는 16절에 이르러서는 뭐를 얘기합니까. 오늘 본문입니다.


몬1:16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16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죄를 짓고 빌레몬을 떠나있는 것입니다. 주인의 돈을 훔쳐서 로마로 도망간 것입니다. 그 쓸모없고 벌주고 싶은 노예에 대해서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간청하는 것이 있습니다.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이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무조건적인 용서를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죄로 인하여 벌받고 심판받아 죽을 수 밖에 없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그 은총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이라는 것은 무조건적인 은총입니다. 즉 우리가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받은게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받는 은총입니다. 사랑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나 된 것’입니다. 그런 우리라면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는 것도 무조건적인 것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편지를 쓰는 바울은 빌레몬에게 복음을 직접 가르쳤습니다. 빌레몬이 사도를 통해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을 알게 되었고 그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 또한 그렇게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오네시모에게 베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에 늘 기도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가 형제의 죄가 형제의 잘못이 드러날 때, 어떻게 그것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의 허물을 덮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먼저 받은 큰 은총을 기억할 때, 형제의 죄를 용서하고 그를 용납해서 그와 하나되는 일은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받았으므로 받은 그것을 베푸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조건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18:21-35]에 예수님께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에 관한 비유가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임금이 너무 불쌍해서 그 빚을 아무런 조건이 없는 것으로 해주었습니다. ‘일만달란트의 빚’이라는 것은 임금의 말에 의하면, 그 종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죽도록 일만해도 값을 수 없는 그 빚인 것입니다. 언제는 ‘일만달란트 빚’ 이것만 계속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의 빚이라는 것이 이렇게 많고 많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빚을 탕감받은 종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자기한테 백데나리온 빚진 자를, 쉽게 말하면 몇십만원 빚진 자를 용서안하는 것입니다. 조금 잘못한 자를 용서안하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이 화가 나서 다시 그 종을 붙잡아서, ‘너 일만달란트 다 갚으라고 못갚으면 감옥들어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나를 힘들게 하고 나에게 잘못하는 자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먼저 받은 큰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큰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일만달란트’ 입니다. 그걸 갚아주셨습니다. 그것을 아무 보증없이 조건없이 없다고 해주셨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형제의 잘못은, 그가 나에게 진 빚은 얼마나 작은 것입니까. 얼마나 마땅히 우리가 용서해야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제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이전의 종으로 대하지 말고, 어떻게 대하길 원하는 것인가요.


1:16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노예가 아니라 형제라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형제. 이제 그는 사랑받을 일만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이야기입니까. 우리 신앙이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이후라는 것은, 죄가운데 죄의 종으로 살던 우리 인생이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아서 살게 된 이후의 삶이라는 것은, 사랑받으며 사는 삶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일체의 고통이라는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따지고 보면, 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을 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들입니다. 우리 존재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 우리는 사랑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사랑받으며 또 사랑하며 그 가운데 행복하게 살아가야할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무엇이냐? 라는 것을 인간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너무도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처럼, 자기를 비우시고 자기를 낮추시는 그 타자를 위한 희생. 그 본을 우리가 따라 살 때 우리 안에 진정한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면 그 사랑의 방법을 배웁니다. 사랑하는 법 사랑 받는 법. 그 방법을 몰라 인생이 괴롭고 힘들었는데, 그것을 배우면서 우리 삶의 기쁨이 넘쳐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교회 청소를 합니다. 전 성도가 돌아가면서, 의사분도 기자분도 선생님도 학생들도 돌아가면서 청소를 합니다. 더러운 화장실 씻고 휴지통 비우고. 참 아름답더라구요. 그렇게 섬기면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주께서 내 더러운 죄 이렇게 하나 하나 씻어주시고 쓸고 닦아주시고 얼마나 은혜스러운가요. 청소 뿐만 아니라 예배도 섬기고 또 여러 모양의 사역으로 섬기는, 그걸 통해서 우리가 사랑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면서 또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종이 아닌 형제로. 모두가 동등한 자리에서 사랑받는 형제로 둘자라.


몬1:16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이게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노예가 동역자로, 한글 번역에는 ‘동무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노예가 친구가 된 것입니다.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를 보라. 동역자이고 친구입니다. 우리가 시대를 세가지로 구분할 때 성부의 시대가 있고 성자의 시대가 있고 성령의 시대가 있습니다. 성령의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하면 친구의 시대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 예수님은 목숨을 버리는 사이를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오네시모를 그렇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제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말합니까.


‘빌레몬아 내가 그를 만나보니까 그 놈 괜찮던데? 최고던데? 그냥 받아줘!’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는 말을 합니다. ‘내가 같이 있어보니까 굉장히 좋은 놈이야 사랑받을 짓만 해. 그런데 너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더 그랬겠냐고. 너는 얼마나 그를 잘 알겠어? 너가 볼 때 얼마나 더 그에게 사랑할 만한 게 많겠냐’ 고.


사실 우리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따지고 정죄하며 사는 모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처럼 칭찬할 것을 찾으려면 정말 많은 것입니다. 사랑할 만한 게 너무 많은 것입니다. 바울 안에는 정죄의 신앙이 아니라 속죄의 신앙입니다. 어떻게든 미움이 아니라 용서의 마음을 갖고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칭찬할게 너무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지체를 보세요. 너무 귀한 것이 많습니다. 보석처럼. 그 위에 가끔 진흙이 덮여질 뿐이지. 가끔 잘못하고 혈기부리고 이기적일 뿐이지. 우리 인간영혼은 아무리 못나고 추한 자도, 그 본성은 정말로 빛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말을 하고 사는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갖고 형제 지체들을 영혼들을 대하면서 사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 빌레몬서를 읽고 또 읽는 것은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용서를 받은 자가 어떻게 용서하고 사는가. 형제에 대해서 정말 사도의 같은 자세를 가지고 사도와 같은 말을 하고. “내가 그를 보니까 너무도 귀하다. 너는 얼마나 더, 귀하다는 것을 잘 알겠느냐?” 그러면서 말합니다.


1: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사도의 하는 말이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너에게 불의를 하였거나, 그 자식 도망간 놈 아냐? 이런 말입니다. 너에게 불의를 했거나. 그리고 너에게 빚진 것이 있으면. 돈도 훔쳐간 놈이지? 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너에게 빚진 것이 있으면. 말을 우리가 잘해야하죠. 야고보서에 혀는 곧 불이라고 했습니다. 삶의 수레바퀴를 다 태워버린다고 했습니다. 세치 혀가 내 삶을 다 망쳐버릴 수 있습니다. 관계를 다 해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의 편지를 통해서 사랑의 언어를 배우는 것입니다. 불의를 했거나 빚진 것이 있으면,


이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금전적인 것 물질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삶이라는 것은 어디까지 가야하는 것인가. 어디까지 복음의 향기가 미쳐야하는 것인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성 요한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형제의 물질적인 것을 내가 담당하기까지. 그의 힘든 현실적인 문제까지 담당하는 것까지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얘기할 때, 갈라디아서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이게 상업적인 용어입니다. 노예를 돈주고 살 때 쓰는 용어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노예를 값을 치르고 사서 자유케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빚을 자신의 생명의 값을 대신 치르고 갚아주셨습니다.


지금 ‘내 앞으로 계산하라’ 이 말을 하는 바울안에 뜨거운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진 그 빚 일만달란트 그 평생 값을 수 없는 죄값을 다 탕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빚을 대신 지시고 다 갚아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큰 은혜를 생각할 때, 너의 작은 빚을 내가 어찌 안 갚아줄 수 있겠느냐? 나에게 다 넘기라고. 그것처럼 사도는,


여러분, 오늘 바울의 아름다운 편지의 글을 우리가 읽으면서 모든 갈등의 관계, 모든 미움과 분쟁의 관계를 청산하고 진정으로 하나될 수 있는 사도안에 큰 세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께서 그에게 보이셨던 십자가의 위대한 사랑을, 그 대속의 사랑을 그는 늘 기억하고 그 사랑에 빚진 나임을 늘 생각하고, 내 삶이 그것을 갚으려는 삶. 그 큰 사랑에 어떻게든 보답하려는 삶. 이것이 사도안에 있는 복음의 깊고도 넓은 정신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 따라서 복음의 향기를 내 삶의 처소마다 진하게 드러내며 사는 모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http://saeanchurch.org/bbs/board.php?bo_table=sermon&wr_id=285>